형태와 의미의 뫼비우스 띠

                                                       - 兪金浩의 『내 사랑 風葬』의 세계 인식-
                                                                     채희윤 (소설가, 광주여대 교수)

예언자이며, 나팔수일까, 작가는? 아니면 회고자이며, 감상적 추억의 실꾸리를 절어가기 좋아하는 이야기의 편집광일까, 그들은? 하나의 텍스트로 우리에게 던져진 그들은 텍스트로만 수용되고,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가일까, 그의 작품일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것은 순환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평이란 것이 그럴 수도 있다는 데에서 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필자는 『내 사랑 風葬』은 반복충동의 확대와 심화라는 심리학적 용어의 인용으로 접근하려 한다. 즉 텍스트 내부의 의미화의 연쇄 속에서, 마치 개인의 본질이 여러 가지 상징적 체계 속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 듯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쉽게 표현될 수 있다. 왜 이토록 유사한 실증적 자료들이 빈번히 나열되어 있을까. 그것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을 작품에 끌어들을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뭘까. 작가의 말대로 이야기 자체의 실제성 때문일까. 요컨대 이 소설은 현실적 세계의 허구화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제와 허구라는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괴리들로 인한 중복일까.

작가의 의도성 때문에 이중의 구조적 매케니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이다. 중층의 구조? 그러나 소설 내부를 지배하는 시선은 하나뿐인데? 그것이 완결미라는 예술의 요소를 지녀야할 소설의 숙명이 아닌가? 그렇지 못하다며 적어도 이중의 이야기가 될 분명한 증거가 내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작가는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독자와의 두뇌 게임을 유발하기 위한 전략에서 이러한 구조를 가져갔다면. 이 작품이 수렴되지 않고 확산만 되어 가는, 잘못 생각하면 구성의 기본적 틀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나처럼 느낀 모든 독자들은 그의 의도의 덫에 걸렸다는 증거이다.

그것이 가장 편한 결론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 속에 어떠한 에피소드에도 구체적 해결을 보여주지 않은 채, 양가적 선택만 보여주는 이유이다.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 라깡식으로 말하면 욕망Desire와 충동Drive. 끝없는 욕구와 그 욕구의 충족과 좌절, 만족과 동시에 허무로 미끌어내리는 욕망의 진혼을 위한 또 다른 욕구, 완벽한 조이상스jouissance를 향한 끝없는 인간의 욕구과 충동. 그러나 언제나 기의記意가 기표에서 미끄러지듯이 그 욕망의 희열喜悅은 늘 미끌리고 만다.

욕망하고 욕망에 좌절과 성공- 그러나 그 성취가 바로 좌절로 이어지는 소설의 이야기, 아니 우리 인생의 이야기의 인물들처럼 -이 소설의 인물들은 어디에도 귀의하지 못하는 영원한 방랑자들 - 나그네-일 뿐이다. 잡았다하면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다시 움켜지기까지는 그만한 시간의 간극 사이에 서 있는 인간군상들이다. 그러나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소설의 의미론적 규명만이 이 소설의 구조적 비형태성을 해석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장편에서는 의미와 형태가 변증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의미와 형태의 결합 양상 자체가 바로 『내 사랑 風葬』이라는 텍스트의 의미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를 통해 접근해 가든지 의미 분석을 통해 접근하든지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겠지만 의미론적 접근이 효과적이라 확신한다. 형식이 갖는 위대성은 우리가 예술의 장르적 변천의 역사를 통해 보아 왔다. 형태적 변화 없이는 의미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선구자들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들의 원형을 깨뜨리는 데에서 그들의 업적을 세웠다. 에즈라 파운드의 무운시, 포우의 상징 미학, 울프의 무의식 등이 그랬다.

새로운 의미는 새로운 형태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그 이름처럼 타 장르와의 교호, 전이, 잠식을 그 근본의 한 자질로 삼는다. 특히 누보-로망이라고 통칭되는 불란서의 작가들이나 마르께스나, 보르헤스 등 오늘날에는 '오믈렛 같은 소설'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플롯 없는 소설이란 것은 문학 연구에 있어서 거의 진부한 용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그 타당성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실 『내 사랑 風葬』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채 다가오는 이유는 그 느슨한 형식에 있다.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자료들이 등장하며, 마르께스의 소설처럼 인물들의 움직임이 모호하며 애매하다. 느슨한, 답답할 정도의 구조는 이 소설이 갖는 의미론적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한 형태에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긴장이 풀린 구조는 주제적 층위와의 조우에서야 비로소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이렇게 느슨하느냐가 아니라, 왜 이렇게 느슨하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본 작품에 잡다하게 깔린 개론적 국문학 지식, 인류학적 지식, 정치적 현실감, 지리학적 지식의 피력 등등의 그 궁극적 의미는 무엇이냐가 되겠다.

또 이러한 부분이 『내 사랑 風葬』이라는 작품 전체와의 관계를 조명해 보는 것이 옳다. 즉 텍스트에 나타난 다양한, 일탈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과연 대구조에 대해 긍정적 기능, 의미의 확대와 수렴을 위한 것인가. 그저 삽화로서 소설의 잔재미를 위해 있는가. 소설이 일탈된 이야기, 소위 여담 digress을 차용한다는 것은 워낙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문제는 그러한 여담들이 작품이 갖는 주제나 의도들과 어떻게 쟁화爭和하며 관계를 맺고 있느냐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소설이란 그것만으로는 문제를 삼을 수 없는 것이 장르적 관습이다. '내 사랑 風葬'에는 무관한 듯이 보이는 이야기들이 끊임없는 틈입되어 관류하고 있다. 만약 그것들이 텍스트 내부에서 하나하나 겉돌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작가의 계략에 빠진 독자이다.

물론 우리는 그를 책망할 수 없다. 작가는 그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주제가 숨은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숨은 그림이 잘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는 형태상 비슷하거나 색깔이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숨은 그림이란 더디 찾게 하는 방법이지 아예 못 찾게 하는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관습에 젖은 우리들의 속악한 독서에 일격을 가하여 세심한 독서와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작가들의 상습적 교활성이며 우월 의식이다. '내 사랑 風葬'속의 모든 여담들은 두 개의 記標들을 향해 있다. 또 그 기표들을 향하여 진행과 퇴행이라는 이원적 흐름을 형성하며 확산되어 가고 있다. 즉 주인물 "강영규"를 중심으로 스토리 라인과 주위 인물들의 이야기가 서로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파동친다.

이는 파동의 간섭현상을 불러 일으키고, 중첩되는 부분에서 맥놀이를 발생케 한다. 맥놀이처럼 같은 의미들의 주기적인 반복이 『내 사랑 風葬』의 진정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예컨대 전편에 걸쳐 무의식적 반복충동으로 나타나는 조류와 장례법이 그것이다. 날 수 있는 새, 걸을 수밖에 없는 주금류走禽類, 멸종된 새 등이 다양한 장례법葬禮法, 조장鳥葬, 풍장風葬, 순장殉葬들과 뒤섞이며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 낸다.

라깡은 무의식적 반복충동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나타난 이 두 개의 기표야말로 이 소설의 방향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며, 그것이 작가가 이러한 구성을 택한 이유이다.

이러한 새의 이미지와 장례의 상징성은 한채희와 어머니의 자살의 소설적 의미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보다 섬뜩한 곳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은 미라의 여담들이다. 틈틈히 잊어질만한 곳에 다시 반복되는 미라mummy들. 미라는 죽음의 박제화剝製化 상태가 아닌가. 모든 욕망의 최종 단계,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는 상태가 라깡과 프로이트는 죽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욕망하는 주체, 인간의 죽음마저 박제화 시키고 있을 정도로 시대를 극복하려는 욕망과 그것의 좌절로 인한 개인의 고통에 천착한다.

주금류들은 새들로서 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는 한다. 새의 기의, 날아다니는 동물이라는 기의는 언어처럼 소설 속에서 은유와 환유로 말이다. 한채희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미라는 시간을 경과해서 인간을 묶어두려는 시도는 이 소설의 여러 가지 장례와 우뚝하게 맞서고 있는 또 하나의 절대기표이다.

존재하나 기능을 상실한 것과 존재하지 않으나 여전히 우리 인간들의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과의 대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상상케 한다. 이러한 이항대립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비교를 통해 생을 원점으로 서로 평형하게 사선으로 갈라진다. 몇몇의 기표들은 이쪽에, 또 몇몇의 기표들은 저쪽에 늘어서 맞섬대를 이룬다. 이와 같이 느슨하게 보이는 본 작품은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이원화된 상황들로 나뉘어 진다. 지리적으로 서울과 마추픽추, 살아 있는 자와 죽어버린 자, 붙박여 살려는 자와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유랑에 오르는 사람 등등으로, 말 그대로 소설의 세계처럼, 세계와 자아와의 끊임없는 대립처럼 이 소설의 구조는 잘 들여다보면 잘 구획된 경지처럼 확절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분화에 대한 작가의 가치 중립적 자세이다. 어느 것에도 쉽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주지 않은 불투명한 의식이 이 소설의 구조와 의미를 상승시키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 작품의 구조는 장의 구분과 관계없이 몇 가지의 기표들이, 이야기 단위들이 반복되며 확산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쉬 수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소설과 구분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 도중에 결말에 이르게끔 하는 어떠한 목표지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말이 아니라 의식의 무한한 자유를 통해 발산되어 가게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미덕이며, 마땅한 바이다. 소설의 완결 부분에서의 모호성은 이러한 작가의식의 발로에서 비롯한 것이라 여겨진다.

주 초점화자로 나타나 있는 강영규와 오히려 철저한 외면화를 통해 존재하는 시인 윤진우, 그와 비슷한 계열의 한채희와 박민주 등의 존재적 가치와 인물이 결국 텍스트 내부의 상징물이라면 그들이 마침내 은유화 시킨 것은 무엇인가. 아니면 주제적 층위에서의 그들의 기능은 과연 무엇인가.

한채희와 박민주라는 인물들에 의해 드러나는 이항적 구도는 어떠한가. 그녀들이 그리는 소설 내부 공간에서의 동선動線은 "나그네"라는 장소를 기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는 존재하지 못하게 장치되어 있다. 왜, 무슨 이유일까. 그러고 보면 소설의 인물들 모두 <나그네 >라는 공간적 좌표를 정점으로 하여 움직인다. 술집다운 이름이나 조금은 구태를 못 벗은 이 기표에 작가는 어떤 기의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 그 기의는 얼마나 미끄러져 나갈까.

한채희와 박민주는 모두 주인물 강영규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과연 박민주가, 서술상 그녀가 갖는 중요함과 구조상의 기능에도 불구하고 의미론에 있어서 한채희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한채희, 어머니, 아버지 등의 인물들이 '강영규'에게 얹어 놓은 의미만큼 클 수 있을까. 그들은 죽어있어도 살아 있는 존재이며 작가는 삶의 문제에 보다 죽음의 문제에 고착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과연 구조의 느슨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작가는 작품의 구조를 끌어올린 것이 아닐까. 독서시학의 측면에서, 작가와 독자의 지적 게임을 즐기기 위한 또 다른 배려와, 작가의 오만한 승부의식이 바로 이 작품을 이러한 구조를 만들었다는 혐의는 그래서 깊다.

그것은 인물들의 제시 방법에서 확연하게 드러낸다.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데에서, 마치 우연처럼 그러나 충분한 타당성을 가지고 그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소설의 미덕 중의 하나는 우연성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필연성의 모더니즘적이며 서구적 인과율에서부터 보다 자유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카오스 이론이나, 최근의 불연속적 이론으로 보면 우연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轉向과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은 논리적 연역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연이란 직관적 사유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상학적인 "의식의 제로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旣存의 것들에 대한 어떠한 의무나 부채를 지니지 않는다. 인물들이 그곳에 있었던 사실은 바로 지금 현존의 문제인 것이다. 있으면 됐지. 왜 그녀가 그곳에, 왜 그가 그 시각에라는 소설적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우연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런 무속박성이 우리의 생에 날개를 입혀 자유롭게 하듯이, 소설은 지나치게 인과적 구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흐친의 말마따나 "상호 대화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의 우연성은 물론 작가의 의도에서 나온다. 문제는 작가가 왜 이러한 서술구조를 견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매우 위험하게도 다양한 학문의 인용이나 기행문으로 보이는 듯한 마지막 장에서의 문제들, 새들의 이야기 등등은 소설의 구성상의 약화를 가져와 치명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구조를 갖게 했을까 이다.

아무래도 잠정적이며, 매우 위험한 결론을 내려야겠다. 『내 사랑 風葬』이 이러한 구조를 갖는 것은 작가와의 관계의 밀접성에서 기인한 것 아닐까. 요컨대 작가의 주변의 인물들과 작가 자신의 고착적 기억들의 소제燒祭를 위한 기획 의도를 소설적 양식 속에다 불러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자이며 소설적 인물인 강영규는 이원적 인물이 되었고, 시인 윤이나 그중 몇 사람 역시 현실에 실존하는 신물들을 소설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소위 차용된 인물( Figure - on -loan)들이다. 작가는 소설이 양식과 소설의 특성을 깨뜨리지 않고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을 고해하기 위한 전략적 방편으로 이런 구조를 만들었으며 또, 위에서 밝혔듯이 작가 자신이 독자와 숨은 그림 찾기의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헤겔은 인간이 처할 곳은 두 개의 상황밖에 없다고 한다. 진행적 progressive인 상황이냐 아니면 퇴행적 regressive인 상황이며, 그 사이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전자는 진취적이며 강한 성취욕을 가지고 삶을 개척하는, 성글게 말해 리얼리즘 소설의 긍정적 영웅이며, 후자는 현재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그래서 퇴행적 사유의 가장 초기에 나타나는 향수적 nostalgiac 사유를 하며 자궁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퇴행적 상황에 처한 존재는 운명을 쉽게 개선하지를 못한다. 그가 개선하지 못한 것은 외부의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차꼬에 의해서이다. 그는 사유론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풀어지지 않을 경우 어떠한 것도 외면화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다.

『내 사랑 風葬』의 주인물들은 대부분 사유론적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부에서, 자신 스스로가 자기 행위에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다. 현실은 어떠한 개인의 내부의 형상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극복의 기제로서 여러 가지를 사용한다. 모롱의 개인적 신화도 이러한 데에서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헤겔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내 사랑 風葬』이 몹시 프로이트적이라는 나의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위에서 말한 두 개의 인간 상황을 끄집어내어 퇴행적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편-향수적鄕愁的, 강렬한 자궁회귀 본능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는 것과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 양상과 그것들의 심리학적 분석의 임상일지를 우리에게 내민다.

사유론적 존재들과 퇴행적 존재는 어느 측면에서 동일한 층위에 놓을 수 있다. 내부에 가득한 자기 욕구를 - 때로는 근원적인 타부가 아니라도 - 외면화 행동화시킬 수 없는 경우를 억압이라 한다. 억압이 지속될 때에 인간은 생존 위협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는 항상성이 있어 그러한 사회적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우회할 수 있는 힘을 환유에서 찾는다. 사실 글쓰기의 技術은 박해와 관련이 있다고 라깡은 주장하고, 프로이트 역시 예술은 일종의 콤플렉스의 승화라고 보았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은 꿈을 통해 사회적 검열을 은유(압축)와 환유(전치)로 나타내어 억압을 벗어나려고 한다. 억압이 지나칠 경우 인간은 미치든지 자살을 하든지 하기 때문에 꿈은, 때로는 망상은 그것의 조절을 위한 꽤 훌륭한 기제이다.

라깡은 작가들을- 그에게는 뒤라스였지만- 가리켜서,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배워야할 것을 미리 알아버린 자들이라고 했다. 작가는 그렇게 미리 아는 자이며, 작품은 그 미리 아는 것을 나타내는 임상적 기록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디를 앓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인가. 언제나 그들이 존재하는 현실 내부에서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동시대의 세계를 떠나서 작가는 존재할 수 없다.

『내 사랑 風葬』은 주인물 강영규의 에로스를 통한 타나토스의 극복으로 사랑이란 실체의 발견, 어쩌면 사회적 정신적 혼란기의 정체성 찾기의 임상적 기록이다. 즉 유년의 암울한 존재에서 건너 뛴 한 남자의 주체적 자아 찾기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그렇듯이 그 주체적 자아의 형성에 이르는 路程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며 중점적인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미끌림이다. 물론 이 미끌림은 마지막 호흡이 거두어 질 때까지 계속된다. 또 개인의 에로스는 거대한 다수로부터 차근차근히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경향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에로스로 고착되는 것을 막는 또 다른 요소로 먼지로 되돌아가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상정했다.

『내 사랑 風葬』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뫼비우스의 도형이다. 그것은 별개로 보이나 사실은 같은 범주 안에 있다. 섹스로만 우리는 완벽한 에로스를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에로스의 시간은 길지 않고, 오래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성욕처럼 생겨났다 사라지곤 한다. 욕망의 본질은 그렇다. 욕망은 환유이다. 그러기에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고리이다. 왜냐 에로스는 결코 만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망하는 것은 에로스이며, 그것의 좌절이나 성취로 인한 감정은 타나토스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를 진자의 주기처럼 오가는 우리의 삶은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끝없는 순환도循環圖이다.

그래서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다.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상황은 그대로이며 사유가 확대될 뿐이다. 인식이 깊어지며, 완벽한 사회적 개체로 서게 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주인물은 조교에서 조교이며, 민주의 자리는 대학생에서 대학생이다. 학원 강사, 노처녀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 인생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지 인간의 근본은 언제 '나그네'처럼 외롭고, 욕망의 좌절로 '미라'처럼 덧없이 말라 있고, 기능을 잃어버린 새들처럼 허허롭다. 그래서 그들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유일한 변화는 죽음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이어받아 라깡은 그렇게 말한다. 욕망의 마지막,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욕망은 죽음뿐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변하지 못하고 대신 죽음을 택한다.

『내 사랑 風葬』은 제목처럼 죽음의 강박증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욕망과 죽음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욕망의 최고인 죽음의 에피파니는 한현상과 채희 두 사람에게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마저도 제공받지 못한 것은 아직 욕망의 정점에 가 닿지 못하고 있다는 말의 환유이다.

어머니와 한씨 가문의 남매들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매우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 퇴행의 마지막이 자살이라면, 자살은 퇴행일까 진행일까. 사유론적일까 행위적인 차원일까, 자살은. 그리고 자살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의 부채는. 그러므로 어머니와 한채희는 도플갱어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영규에게 오히려 '추상으로 어머니를 새겨 놓았듯이' 채희는 구상으로 육체를 체험케 함으로서 오히려 '더 추상인 세계, 이유를 확인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영규와 현상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 시인은 누구인가. 욕망은 타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타자가 없으면 욕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 상상계에서는 욕망은 스스로에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상징계로 들어서면서, 사회적 존재로 인간이 되기 시작하면서, 나란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함으로써 인간은 욕망을 하게 된다. 나는 나를 욕망할 수 없다. 타자가 타자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는 초점화자를 윤진우로 삼지 아니하고 강영규로 삼았을까? 타자인 그가 주체인 영규를 더 잘 볼 수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이 소설의 독특한 가치는 여기서 발현된다.

이루지 못한 욕구는 괴로움이다. 고통은 원망願望과 현실의 괴리에서 생긴다. 그러나 현실은 만족되어 지지 않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되어 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욕망이 완성되는 순간 다시 미끄러져 내리는 기의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욕망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주인물들은 그래서 사랑을 택한다. 욕망의 마지막 대상은 에로스를 가진, 나와는 다른 성을 지닌 에로스적 존재가 그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원칙이라고 불리는 것이 금기한다. 금기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이 어울러져 거대한 억압으로 밀려올 때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라깡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은 주체가 부모 둘 모두에게 거세 위협을 당할 때 생긴다고 했다. 그는 햄?을 분석하면서 햄?의 문제가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거세위협이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만들어진 아버지에 의한 자기 자신의 위치 설정의 불안정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고 머뭇거린 것이다. 진정하게 없애야할 아버지가 없어 어머니의 남근이 가능했던 그에게 어느 날 생긴 아버지라는 존재와의 관계 정립의 미확정으로 도리어 어머니에게 반항하며 저주를 퍼부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떻게 될까. 오이디푸스 단계가 불가능할 때, 바로 강영규가 처한 상황이 그랬던 것처럼. 성적 정체성을 깨달아가고, 사회적 주체성을 확립해 나아가는 단계에서 이러한 결핍들은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자궁을 상실한, 퇴행적 공간을 원천적으로 봉쇄 당한 주체들은 어떠한 것을 그들의 극복 기제로 삼는 것인가. 더구나 그 자궁이 자연적인 소멸이 아니라 인위적, 의도적으로 발생할 경우에는 모자관계의 일방적 해지라는 이중의 상실이 그에게 내려지고, 대항적 극복력도 두 배로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결핍된 여성성과 상실된 오이디푸스적 세계가 이 작품의 전체 지형도이다. 텍스트에 나타난 수많은 남성성의 기표들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그가 대지와 교섭하는 장면에서는 신화적 세계에서 뿐 아니라 언제든지 가능한 남성 영웅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결핍에 대한 요구, 즉 욕망은 미처 환원시키지 못한 잔여물로 주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욕망은 순수한 결핍이 갖는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만족을 위한 욕구도, 사랑에의 요구도 아닌, 요구에서 욕구를 뺀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동시에 양자분열의 현상 그 자체이다. 주인물이 갖는 양가적 태도나 부정적 존재로 개적 인간이 아니라 공권력이라는 추상체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양자분열 현상에서 비롯된다. 즉 이 작품에는 어떠한 부정적 존재도 개별화되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대상이 추상적일 때 주체는 더 추상화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불가항력의 경우를 부딪힐 때마다 사람들은 좌절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모색한다. 가장 편한 기억, 생명의 아프리오리한 그곳은 어머니밖에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다. 그것도 가장 필요한 때, 즉 사춘기도 오기 전에 어머니는 내 곁에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단계를 주인물은 뛰어넘는다. 그는 심리학이 가져야할 보편적 과정에서 소외 받은 자이다. 그래서 여성성은 그에게 결핍되어 있다. 결핍은 충족을 욕구하게 된다.

결핍에의 충족을 그는 에로스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성욕은 일회적으로 만족되는 것이 아니며, 확대되어 가면서 또 다른 욕망을 욕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속 남아 하나의 대상을 갈구한다. 따라서 주인물이 어머니의 상실과 아버지와 근본적인 소외로 황폐해진 자기 세계에서 유일하게 맞섬이 아닌 화합의 관계라는 진실을 선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라깡의 말처럼 남녀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 영원히 흘러 넘치는 희열jouissance의 관계이다. 그러나 에로스라는 기표는 남근 phallus과 같다. 그것은 드러나면 허상이고, 억압되면 기능을 발휘하는 진리와 같다. 그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이 상징계이다.

즉 그는 기표로서 남근이었으며, 기의로서 소설 전체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강영규가 서술화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는 텍스트 내부에서 대모大母와 대부적大父的 위치에 있었던 증거이다. 모든 것이 그라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으며, 그는 등장인물 모두에게 관계를 맺는 소설적 전능인이기 때문이다. 그와 관계 맺지 않은 이야기는 소설에 있지 않으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그와 관계를 갖는 순간 상징적 기호로 반전되어 의미를 갖게된다.

그것은 또 이 소설이 느슨해지며 - 왜냐면 모든 것을 서술화자 자신에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성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 이는 성적 묘사와는 다르다. 잘 보면 알겠지만 주인물 강영규는 전편에 걸쳐서 초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장 정점에 서서 소설 내부의 모든 사건들을 간섭하며 평가하고있다. 그가 남근적 존재라는 것은 등장인물 모두에게 이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있는 점이다.

『내 사랑 風葬』의 작가는 마치 고해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고 술회한다. 결국 이 소설이 자전적 경향을 강하게 가졌다는 것이며, 그런 만큼 작가의 의식과 작품의 철학은 견고하게 응고되었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의 윤색이라면 본 작품은 고백적인 글이며, 그것은 허구성의 축소와 반비례해 역사성이나 현실성의 확대된다. 허구성이 약화되고 역사성이 강화될 때 파생되는 처음 문제는 현실감의 문제이다. 그것은 감동을 이해의 매개로 하는 문학과 다르게 진실을 매개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문학의 추구가 아니다. 작가들에게 자유로운 상상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 風葬』은 썩 훌륭한 소설이다. 자서전일 뿐 아니라 어느 한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겪어 온 작가가 자신의 주관적 사유의 편린들을 소설의 품위를 지켜서, 이토록 매력적이며 독특한 방법으로 소설을 썼다는 점은 분명 우리 소설의 새로운 전례(典例)를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 동원된 여러 가지 소설의 이론들은 놀랄 만큼 다양하다. 즉 쉴츠의 비대칭적 복인물 doubles이나, 도플갱어doppleganger, 차용된 인물, 자유와 죽음이라는 기표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든 수많은 여담 등은 모두 자서전적 이야기에 가능한 한 극대의 허구화를 가능케 하고 있다. 소설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중견 작가의 매서운 자기 갱신이야말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 현실에서, 젊은 나이에 이름난 문학상의 수상과 함께 '장인'이 되어버리고 그대로 자기 패턴을 굳혀버리는 현실에서, 원로의 나이에도 여전히 방법론적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