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티와’나무, 그 너머에는…     
 
                                           -유금호의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읽고-
                                                                 이 목 연(소설가)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거나, 조용히 비가 내리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 가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려지는 소리가 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그 중얼거리는 장소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 그것도 언제라도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편안한 장소라는 사실에 나 자신 문득, 놀란다. 가장 안락한 순간,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의 부재…. 그래서 어느 시인도 노래했을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난 그대가 그립다, 고.

유금호의 작품집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읽으면서도 허공, 그 너머를 바라보는 작가의 빈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는 낯선 곳을 쉴 새 없이 풀어놓으면서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아 다시 허공을 더듬는 그의 시선.

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만나기란 현실 속에선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작가가 그리는 허구의 세계에서 진솔한 인물을 만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가공의 인물들과 속을 터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역설적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보다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는 상상계 역시 인간들의 영역인 것을.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주인공에 흠뻑 빠져 같이 고뇌하고 같이 분노하다가, 씀벅거리는 눈으로 밤을 꼬박 밝히는 일 또한 인간의 특권임에야.

이처럼 작품 그 너머를 같이 볼 수 있고, 그대 곁에서도 <그대>를 그리워하는, 그 상상력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음에 소설의 긴 역사가 이어지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유금호의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는 같은 공감대를 누리기에 충분한 작품집이었다.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모질지 못한 인물들과, 그들의 뿌리 찾기, 죽음에의 천착으로 인한 서정의 배경과, 되풀이되는 소재와 줄거리 등,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에서 만난 것들을 통해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 행여 내가 늘 그리워하는 <집>이 있을지도 모를 그 허공 너머를 기웃거려보았다. 

 
*모질지 못한 인물들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세상살이에 밝지 못하고, 영악스럽지 않다. 또 모질지 못하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에 나오는 아버지가 그렇고, 월남에 왼손과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온 형이 그랬다. <상사화 꽃 다지고>의 버버리 아내를 바다에 묻어 버린 주인공 ‘나’가 그렇고, 밀림 속으로 사라진 수잔이나 K,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을 찾아 나선 신병두나 <배꽃 그림자의>의 정 시인…. 하다못해 <꿈꾸어 주는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밀치고 정신이 부실한 여인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말미잘’ 에게서 조차 세상살이의 이악스러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이 한결같이 편안하고 직수굿한 이유를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찾아본다. 그들은 한 고비의 소용돌이를 넘기고 돌아온 이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생활의 현장을 떠나 있다. 대부분 죽음을 배웅하거나 보내기 위해 생활의 현장을 떠나는 중이다. 삶의 현장에서 한 걸음만 떨어져보면 꼭 집어내어 가려야 할 시시비비도, 그다지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 세상살이 아닌가. 자연히 속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넉넉해질 수밖에.

“…누구 잘못도 아니여… 그 시대에는 그것이 옳았으니께… 남의 나라 전쟁에다 목숨 바치고, 청춘    바치고 그랬던 것이니께… 어느 애비가 제 자식들 잘 먹이고, 잘 입고 하고 잡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겄어?”

                                                                  <겨울바다, 잠시 비 내리고>

“아프리카에 와서 느낀 건데요. 원주민들이 병이 나면 마을 주술사가 치료를 해요. 문명인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되지만 병이 나아요.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지금도 이 곳 원주민들은 근대적 개념의 국가, 정부라는 것이 왜 있는지 이해를 못해요.

국경도요….”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

등장 인물들은 앙칼지지 않은 목소리로 할 말을 다 한다. 현실에 직접 참여해서 생경한 목소리를 외쳐대는 것이 아니라 삶을 관조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내뱉는 소리 속에 진리가 있다.

“직접 파 묵는 것만 묵는 것이 아니제….”

이렇게 조금만 물러나서 바라보면 삶의 본질, 존재의 근원을 거창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반복되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전쟁과 태풍 따위가, 관습이나 금기 따위의 인위적인 것들이 얼마나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담담했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서 사는 동안 포악도 떨었었겠지만, 어쩔 것인가. 세상의 힘에 순응하는 것밖엔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민초들인 것을. 그들이 애를 태우며 떠나보냈던 친구, 아내, 형의 죽음을 선선하게 돌아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안 그들이기에 더 서러워지는 지도 모르겠다. 체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성을, 천성이 모질지 못한 작가는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서슬 푸르게 원인과 결과를 따지지 않고 슬그머니 삶을 에둘러 내는 인물들이 있어 소설 읽기가 여유롭다. 

넉넉한 시선의 그들과 비 내리는 바닷가의 한적한 포장마차에 앉아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은 컸다. 성난 파도가 몸을 뒤채는 소리가 들렸고, 그 바람 속을 때 아니게 날아다니는 배꽃도 보았다. 책을 덮고 났을 땐 그들의 배후 인물인 작가의 모든 것, 그의 고향과, 콩자반 같던 버버리 처녀와, 왼손을 베트남에 두고 돌아왔던 형과, 해골바가지에 술을 담아 마시던 그의 어릴 적 친구들과 어느 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 뿌랭이 찾기

작품집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의 선한 주인공들이 떠돌다 돌아오는 세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향 떠난 지 이십 년만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쓰게되는 사투리, 현재가 아닌 과거, 문명세계가 아닌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 화려하게 쌓아놓은 언어의 금자탑이 아니라 그 금자탑을 쌓기 이전의 세계. 작가가 멈추어 서는 이 곳, 뿌리 찾기의 근간에는 문명이 개입되기 이전, 획일화된 시각으로 이 세상이 재단되기 이전의 세계가 있다.   

“고향 떠나면서, 나 살어서는 탯줄 묻은 고향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 그러고 살았지라. ……죽은 놈들은 말이 없는디, 그 난리통에는 숨소리도 안내고 엎어졌던 놈들이 무슨 애국자들이라고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걸보고 에라, 태어난 나라도 잊어뿔란다, 그라고 다시 10년이구만요……. 버버리 숭내 낼망정 사투리는 안 쓸 것이다, 그라고 10년, 다시 10년, 그런디 이상하제라… 지 뿌랭이란 것이 그리 쉽게 안 떠나는 것인가, 그 생각 많이 드요……. 사람마당 지도 어쩌지 못하는 지 뿌랭이가 있는 것인 갑디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

“자랑스럽던 언어 구조물들이 서서히 금이 가고 와해되어 쏟아져 내렸다. 한 순간 접착력을 잃은 언어의 조각들은 몇 개의 단락으로 해체되면서, 문장들로 나뉘어져 질서를 잃고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단어의 조각들로, 끝내는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 구조물들은 끝내 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아득한 깊이의 동굴 속으로 내 육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가 일었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말이라는 것의 맹랑함. …… 한 개의 적절한 단어, 하나의 문장, 그것들의 조합을 위해 내가 기울여왔던 한 시절의 노고가 얼마나 도로와 낭비였는지. 더구나 언어가 소통을 정지했을 때 매미 허물 같은 흔적뿐인 무의미라니…….”

                                                                   <시실리에서>

말, 언어의 뿌리 역시 그가 찾는 뿌리에 잇닿아 있는 것이다. 말이 갖는 공소감, 그 언어의 허상을 알게 된 ‘나’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마음이 통하는 세상에선 더 이상 화려한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같은 공간의 시간에 따른 정반대의 세계. 현실 세계와 초현실 세계, 속(俗, Cosmos )과 성(聖, Chaos)이 잠시 혼재(混在)하는 시간, 여인은 지금 낮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린 듯 싶었다. 그것은 문명과 야만(野蠻)이 상치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공존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

문명화되기 전, 도덕과 규범으로 물들기 전인 유년의 기억과, 때를 놓치고 피어난 배꽃 이파리의 고향 역시 작가 유금호가 현실 세계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가장 깊숙한 뿌리인지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지구상의 구석구석을 훑으며 다녀도 결국 그의 눈길이 되돌아와 머무는 곳은 어릴 적 태풍이 쓸고 간 남쪽의 배나무 밭 언저리이다. 설화와 신화 속을 여행하는 중에도, 전쟁터와 다름없는 밀림이나 사막의 원초적 생존 경쟁을 목격하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중에도 그의 가슴에 맺히는 심상은 결국 비 내리는 바닷가의 배나무 밭, 인연을 잘못 만나 어긋 피어난 배꽃 이파리 아니던가.

그가 바라보는 끝에는 언제나 고향이 있다. 그의 고향은 뿌랭이 찾기로, 해체된 언어의 뒤에 남아 있는 무언의 세계로, 낯선 아프리카의 커다란 우산아카시아나무 뒤쪽 검은 어둠 저쪽에 존재하는 주술적이고 야만적 세계의 생명력과 활기로, 친구의 죽음을 묻으며 바라보는 고향에서의 유년의 기억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 서정의 배경

삼 년 전에 펴낸 장편 소설 『내 사랑 풍장』을 읽고 나서 오래도록 남아있던 그 서정적 이미지가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를 읽으며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의 작품 전반에 밑그림으로 깔려 있는 배꽃 이파리와 바닷가, 그 수채화 같은 밑그림에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된 말 줄임표,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나는 장면의 전환, 문단과 문단 사이의 단절, 그리고 구수한 남도의 사투리…. 이런 장치의 적절히 배합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작가의 마음 속 여백까지 찬찬히 읽어내게 하며 서정의 극치를 이룬다.

“잎사구하고 꽃하고 한 번도 못 만나는 즈그들 그 깊은 한을 독기로 내뿜고 있는 하필 거그, 잔디밭에 둘이 자빠진 것이 눈꼴이 시리고 시려, 우리 각시, 뻘밭에서 잠시 넋 놓고 있을 때 이빨 갈고 달려오는 파도를, 그 상사화 붉은 꽃무더기 얽힌 혼이 바다꺼정 쫓아와서 두 손으로 각시눈을 가려버렸는지 모르지라…”

                                                                     <상사화꽃 다 지고>
 
목포행 밤 기차에서 내리면, 그 어두운 바닷가에 앉아 전어를 앞에 놓고 말좆곱부에 천천히 소주를 따라 마시고 앉아 버버리 아내를 회상하고 있을 그를 만날 것만 같다. 지금이라도 말이 필요 없는 ‘시실리’라는 마을을 찾아 들어가면 꼭 필요한 하루치의 고기를 잡는,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그런 노인과 샤샤를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암보셀리에 남아서 주술적 힘과 원시적 생명력에 흠뻑 취해 있을 수잔과 K. 익어가던 과일을 태풍에 날려버린 후에 허허로운 눈길로 그 배밭을 바라보고 있을 아버지나,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사랑하는 이와 왼손을 월남에 두고 온 형, 기분이 너무 좋으면 입에 거품을 물며 눈을 까뒤집던 말미잘 같은 여인, 뱀술을 많이 먹어 아내를 거느리지 못했던 나일남…. 어쩌면 이들 모두가 시실리(時失理), 아니면 신선(神仙)골쯤 되는 한 전설 속의 마을에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옆에는 버버리 여인과 소지공양을 올린 배꽃 같은 누이가 조용히 웃고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금기를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미소는 소리 없이 더 고울 것이다. 이른봄부터 피어난 상사화 이파리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으려나. 아니면 그 이파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검붉은 상사화 꽃만 거미 같은 발을 들고 피어 있을까. 아니, 그 세상에는 상사화 이파리와 꽃이 함께 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체와 인물이 만들어내는 표피적인 서정성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삶의 저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었다.

삶의 저편. 그렇다. 그의 작품이 출발하는 곳은 늘 이승의 삶이 끝나는 중이거나, 일상의 저편으로 떠나는 중이다. 많은 죽음을 목격한 세대이긴 하다. 철 들기 전부터 목격했던 죽음은 시체의 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탄피를 주울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거르지 않고 찾아들던 죽음과 그 남녘 고장의 비극성. 그의 작품에 유난히 많은 죽음이 등장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체 곁에서 탄피를 주울 때까지만 해도 추상적이었던 죽음은 시체의 입 속에서 허옇게 구물거리던 밥알 같던 구더기와 새파란 빛으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며 구체적으로 인식되었다. 사라호 태풍으로 폐허가 된 배나무 밭, 넋을 잃은 듯이 뒤늦게 피어난 몇 송이의 배꽃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에서 죽음의 뒤편에 있는 허무의 실체까지 보아버린다. 그렇기에 배꽃의 서정은 늘 죽음을 앞세운다. 그 후로도 이어지는 죽음. 몇 푼의 돈에 목숨을 담보로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죽어 가는 젊은이, 광주 사태 때 무모하게 폭도로 몰려 사라져야했던 시민들. 거기에다 이제는 그 험한 이승의 세월을 살아낸 자들의 물리적인 죽음까지…. 그는 숱한 죽음의 곁에 있었다. 죽음도 반복해서 만나다보면 친숙해지는 모양이다. 무덤을 파헤쳐 꺼낸 해골에 술을 부어 마실 만큼 그가 바라보는 죽음은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게 죽음을 바탕에 깔고 관조하는 세상에선 저 마다 지닌 서사가 때론 부질없기도 할 것이다. 문장 곳곳에 보이는 말 줄임표에 내심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건과 인물이 얽히고 섥혀 태어난 티와나무

이번 작품집의 낯선 것 중 하나로 작품과 작품 사이, 그리고 작품 내에서 유난히 중첩되는 고리를 들 수 있겠다. 이렇게 같은 공간, 같은 이미지, 같은 상황들이 겹쳐야 했던 이유가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은 작가가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자신의 우둔한 탈출시도가 현장법사 손바닥 안을 맴돌던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종착지에서 여전히

 누추한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는, 똑같은 상황을 맴돌고 있었다.”

                                                                               <작가의 말>
 
그렇다면 작가가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것, 이처럼 한 뿌리에서 가지를 친 듯한 작품집의 근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여울의 중심에 ‘티와의식’을 대입해 보았다.

빗물이, 오랜만에 흘려보는 내 눈물이, 희생물의 피 대신 비석을 적시는 동안 형의 영혼을, 아버지의 영혼을, 어머니의 영혼을 자유롭게 떠나보내는 티와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

징용으로 끌려갔던 전쟁터에서 원주민과 사랑에 빠졌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와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사랑하는 여인과 왼손을 베트남에다 두고 온 형의 이야기,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 찾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전쟁터에서 자바 여인에게 혼을 빼앗긴 채 돌아와 허깨비처럼 사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베트남 전쟁 중에 사랑했던 여인을 남겨두고 돌아온 형은 어머니무덤 맞은편에 ‘나’의 생모인 그 자바여인의 빈 무덤을 이장한다. 한국에서의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베트남과 수교가 되자마자 사랑했던 여인 아우 코를 찾아나선 형은 그녀의 죽음을 알고 영원의 길까지 뒤쫓는다. 형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생모의 삶까지 이해하게 되는 이 작품의 주제는 ‘티와’의식이다.

이승에서의 삶의 고리를 풀고 영원의 길로 죽은 자들을 떠나 보내며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기를, 가벼워지기를 기원하는 ‘티와 의식’은 <상사화 꽃 다 지고>에서도 나타난다.

“……나가 살어 있는 동안은 우리 각시 나 맘속에 살어 있응께…… 나하고 여기까지 같이 온 것이제…… 인제 보내 줄라고…… 죽은 사람 너무 오래 품고 있어도, 저도 괴로울 일이고…… 1년 동안 내 오묵 가슴 한가운데 살고 있었으니께, 인제 보내줄라고……”

                                                                      <상사화 꽃 다지고>

사랑하는 아내를 한껏 애도한 후에 훨훨 날아가도록 놓아주는 죽은 자에 대한 배려. 역시 ‘티와의식’ 아닐까. <겨울바다 잠시 비 내리고>에서 포장마차에 앉아 전어를 구워 먹으며 아내를 회상하는 사내에게로 이어지는 ‘티와의식’은, 손가락을 잘라 소지 공양을 올리는 이복누이의 <배꽃 그림자>에서 더욱 처연하게 치루어진다. 말미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어릴 적 친구 세달이의 죽음을 묻고 오는 <꿈꾸어 주는 사람>과 죽음을 앞둔 친구를 찾아가는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에서는 그들이 살았던 생애와 고향과 친구들을 추억하는 것으로 ‘티와의식’을 치루어 준다.

그 ‘티와의식’은 원시의 생명력이 넘치는 아프리카에서 안식을 찾는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과 <OUT OF AFRICA>로 한 쪽 가지를 벌리며 현대의 편협한 문명을 장사지낸다. 다른 쪽 가지에는 변질된 문명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수식의 기능으로만 뻗어가며 본질을 잃은 언어의 장례를 치르는 작품 <시실리에서> <신밧드의 모험>이 자리를 잡는다.

9억 년 전의 공룡 화석을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내리는 비 앞에서 퇴화되어 버린 공룡의 흔적과 진화를 거듭하는 물거미 사이를 오가며 찾아지지 않는 정체성을 더듬는 작품, <흔적, 또는 물거미집>은 <꿈 꾸어 주는 사람>의 곁에 작은 가지를 치고 있다. 두 작품의 배경과 비 내리는 상황이 유사하다.

어릴 적 친구들이 무시로 넘나들어도 좋을, <허공 중에 배꽃 이파리 하나>와 <꿈꾸어 주는 사람>에는 홍만이와 세달이, 용구, 병태… 들이 열매처럼 매달리고.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 <상사화 꽃 다지고>, <겨울바다 잠시 비 내리고>에 연속 등장하는 형이나, 버버리 여인. <신밧드의 모험>, <시실리에서>의 무심한 노인의 모습과 <배꽃 그림자>의 태풍에 휩쓸려 2년 농사를 망치게 된 배나무 밭을 바라보는 농부는 <허공 중의 배꽃 이파리 하나> 의 ‘그래도 나무 뿌리는 남아 있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동종의 열매가 된다.

이처럼 모든 인물과 배경, 그리고 이야기가 얽혀진 이 작품집은 한 그루의 ‘티와나무’라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연작 소설 형태를 염두에 두었더라면 이름이나 배경 등을 따로 설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 나갔을 테고, 순수한 단편이라면 각기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새로운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낯익은 형식이었다. 이런 형태의 나무는 아직 낯설다. 앞으로 이 나무가 어떤 형태의 고목이 될지 기대가 된다.
 
이제 한바탕의 굿판은 끝났다.

… 샤먼은 굿이 끝나면 대개 지쳐서 쓰러져요.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의 적응까지 그 불균형의 혼란을 전 이해해요.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못하니까 외로운 거지요. …”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

철 지나 피어난 배꽃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아득한 시선 너머, 텅 빈 허공으로 남아 있는 정체 불명의 그리움의 근원지. 그 선험의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공허할 것이다. 또 그 너머를 기웃거리는 작가의 방황 역시 끝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이번엔 어느 곳을 헤집고 다닐지, 또 어떤 형태의 ‘티와의식’을 거행하며 저승과 이승의 매듭을 풀어나갈지, 여전히 돌아와 배 밭 언저리의 고향에 앉아 <고향>을 그리워하려는지, 직접 드러내지 않고 에두르는 언어의 미학은 또 어떤 식으로 감칠맛을 주려는지 궁금해진다.

유금호의 다음 작품집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못 설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