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학

                                                          -유금호 소설집 '속눈썹 한 개 뽑고 나서'의 세계
                                                                             김정진 (문학평론가)


유금호 소설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방랑하는 배가본드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작들은 못다한 인연을 찾아 혹은 서린 한의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 길떠나는 자의 노래인 것이다. 고흥의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유년시절의 이상향과도 같은 바다는 동경과 삶과 죽음 그리고 인연의 한을 달래주고 치유하여 무화시키는 바다의 이미지로써 여로소설의 바탕이 되고 있다.

삶의 편린들을 채우고 의식 근저부에 침전되어 원형적 상징이 된 바다와 떠도는 영혼의 이미지들이 그의 단편에 그득하다. 고립된 영혼의 한풀이의 떠돎, 그 허무한 세계와의 대립 그리고 주술적 안위는 유금호 소설의 컨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인 데뷔작 <하늘을 색칠하라>에서 소록도에 갇힌 한 예술가의 꿈과 좌절, 허무 인식을 다루었던 그의 작품성향은 여러 장편을 거치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죽음을 너머서는 근원적 절망과 허무에 대한 집요한 추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허무를 초극하는 삶의 의지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중심 되는 모티프는 죽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작중에서의 중요성은 강렬하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에서 형을 찾아 베트남을 헤매는 동생의 이야기는 질기딘 질긴 인연의 끈을 찾아 결국에는 죽음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향 떠나면서, 나 살어서는 탯줄 묻은 고향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 그러고 살았지라. ……죽은 놈들은 말이 없는디, 그 난리통에는 숨소리도 안내고 엎어졌던 놈들이 무슨 애국자들이라고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걸보고 에라, 태어난 나라도 잊어뿔란다, 그라고 다시 10년이구만요……. 버버리 숭내 낼망정 사투리는 안 쓸 것이다, 그라고 10년, 다시 10년, 그런디 이상하제라… 지 뿌랭이란 것이 그리 쉽게 안 떠나는 것인가, 그 생각 많이 드요"

형의 인연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천륜으로 이땅에 함께 사는 우리의 동포애적인 스케일을 가지면서 세계를 떠도는 우리민족의 영혼을 함께 아우른다.

  “빗물이, 오랜만에 흘려보는 내 눈물이, 희생물의 피 대신 비석을 적시는 동안, 형의 영혼을, 아버지의 영혼을, 내 어머니의 영혼을 자유롭게 떠나 보내는 ‘티와’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의 샤만적인 주술행위는 우리나라의 샤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의 서사는 자못  역사성을 견지한다. 징용으로 끌려갔던 전쟁터에서 원주민과 사랑에 빠졌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와 월남전에 참가했다가 사랑하는 여인과 왼손을 베트남에서 잃고 온 형의 이야기는 나에게 그 은원을 풀게 하는 플롯은 다친 영혼을 치유하려는 원형복원적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자바 여인에게 혼을 빼앗긴 채 돌아와 허깨비처럼 사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베트남 전쟁 중에 사랑했던 여인을 남겨두고 돌아온 형은 어머니무덤 맞은편에 나의 생모인 그 자바여인의 빈 무덤을 이장했다. 한국에서의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베트남과 수교가 되자마자 사랑했던 여인을 찾아나선 형은 그녀의 죽음을 알고 저승을 따라간다. 형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생모의 삶까지 이해하게 되는 이 작품은 진정한 죽음을 샤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승에서의 삶의 고리를 풀고 영원의 길로 죽은 자들을 떠나 보내며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기게 만드는 치유의식은 은 <상사화 꽃 다 지고>에서도 나타난다. 취객의 판소리 사설을 상기시키는 수다스런 내용을 가득 매운 서사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연의 틀속에 상처 입은 영혼 달래기에 다름 아니다.

"……나가 살어 있는 동안은 우리 각시 나 맘속에 살어 있응께…… 나하고 여기까지 같이 온 것이제…… 인제 보내 줄라고…… 죽은 사람 너무 오래 품고 있어도, 저도 괴로울 일이고…… 1년 동안 내 오묵 가슴 한가운데 살고 있었으니께, 인제 보내줄라고……"

 <상사화 꽃 다지고>의 소제가 주제화된 상상화의 특징이 바로 님을 한번도 볼 수 없는 꽃과 잎의 관계인 것이고 그 서러움은 죽은 아내와 죽은 형의 바닷가에 와서 술잔 속에 넣어마시는 행위로써 위안이 되는 행위로 서사 형상화되는 것이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의 형의 죽음이 이 작품에서도 반복 제재로 등장하는 것은 한의 범주가 부모, 형제, 가족 동포로 퍼져가는 샤만의 주술적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한 에너지는 <숨어있는 혀>에서처럼 방언의 향토성과 화자의 서술로만 이루어진 극성을 겸비한 까닭이기도하다.

"아프리카에 와서 느낀 건데요. 원주민들이 병이 나면 마을 주술사가 치료를 해요. 문명인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되지만 병이 나아요.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지금도 이 곳 원주민들은 근대적 개념의 국가, 정부라는 것이 왜 있는지 이해를 못해요. 국경도요…."


오지에 와서 비로소 삶의 안식과 영혼의 평화를 찾은 수지에 대한 이해와 비려는 이미 서로에게 치유의 힘이 되어버린다.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드넓은 아프리카 평원 위에서 솟아오르는 대지의 에너지와도 같다. 

“삶의 풀길 없는 외로움을, 그 새벽, 같이 흐느끼고, 서로의 살을 탐하던 어둠이 떠나면, 낮 시간이 전혀 다르게 열린다는 것을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을 것이다.....샤먼은 굿이 끝나면 대개 지쳐서 쓰러져요.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의 적응까지 그 불균형의 혼란을 전 이해해요. 어느 한 쪽에도 머물지 못하니까 외로운 거지요. 아프리카에 와서 평해졌어요, 빛이 약해지면 빛이 머물렀던 어둠이 오면서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될 것이다.”

수잔의 입을 빌어 아니 그녀의 영혼을 빌어 진술하는 작중인물의 인식은 이미 타자에의 배려로서의 영혼확장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유사 소재는 <라마에 내린 비>에 이어지고 있다. 

지수림과 못다한 인연은 부친의 사망 등으로 일상에서 지워졌지만 그 배려는 둘에게는 상처가 되었고 그 다친 영혼은 떠도는 동안 스스로 치유되었다.   

유금호 소설에 유독 세계여행담이 많은 것은 그의 삶과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소이이다. 방학에 아프리카로 배낭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했었던 친구가 사망하자 그 친구와의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생각으로 혹은 그 친구의 삶을 대신 살아주어야 한다는 우정으로 작가는 여행을 다닌 모양이다. 그것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주는 치유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주로 오지를 중심으로 떠나곤 했다. 마사이 원주민 마을, 아마존 밀림의 벌거벗은 인디오마을, 몽골의 초원, 안데스 산맥 마추픽츄, 중국 돈황의 명사산, 이집트, 미얀마, 페루 등등을 그의 표현대로라면 지구촌 곳곳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여행을 다니면서 비로소  유년과 형제과, 부모, 만나지 못한 제자들, 돌아오지 않는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역사, 생로병사의 여로,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는 것들이 이 지상의 공간 어디에서도 재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뒤 꿈이 갖는 넓은 시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중하지만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은 종종 작가의 예민한 촉수에 걸리면 작품이 되는 주요 소재이기 마련이다.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과 <사라지는 것들, 남는 것들>은 존재론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아픈 역사에 세워주는 상징적인 기념비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신진 페리호라는 유람선상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짧은 인연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의 한맺힌 삶을 투영시킨 이 작품은 여인의 순수성과 한을 상호 투영시킨 세련미가 돋보인다. 

바람을 찍으려는 박민주는 순수한 인간의 본모습을 상징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피사체로만 모습을 드러내는 즉, 이미 순수를 잃은 바람은 이땅의 여인네 가령, 자신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여자는 시골에 묻혀 있던 내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상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었지 싶다. 인내와 강인함, 침묵, 그런 분위기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여자를 인식하던 내게 B의 고백은 너무 충격적이었고, 의외의 일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말하자면 바람 같은 존재여서, 어머니가 늘 같은 자리에 버티고 선산이나 바위 같다고 느껴졌던 것일까. 시골 집 뒤 에 대밭이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대밭에 바람이 스산하게 일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늘 안절 부절 못하셨다. 그런 며칠 후면 아버지는 그 댓바람 소리에 섞여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럴 때 어머니는, 네 아버지 돈 벌러 가셨다.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 오시지 않는 여러 날 동안 아랫목에 아버지의 밥이 식지 않도록 방석으로 덮여 있었 것 역시 낡은 흑백 사진처럼 내겐 늘 남아 있다. 아버지의 옷가지들은 그때도 늘 정갈하게 손질되어 채곡채곡 개켜 있었다. 보름이고 한달이고 지나 아버지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 오셨을때도 어머니의 표정이 언제고 한결 같았던 것을 나는 당연하게만 보아 왔다.”

댓숲의 소리에 끌려 집나간 아버지나 역시 그 소리에 이끌려 새 남자를 본고 선산에 묻히지 못한 어머니의 한은 마땅히 인정해주어야 하는 삶의 진실이다. 이설이나 편견에 시달려야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남는 것들>에 이르면 작가의 배려는 더더욱 세심해진다. 아프리카 케냐에 알지 못하는 묻힌 일본인에 대한 관심도 영혼치유의 시선으로 다가선다.

“香味川純平. 동양적인 화강암 비석이 떠오른다. 그위를 아프리카의 1월 하순, 선선하고 상쾌한 석양 공기가 지나다가 내 귓볼을 간지린다. 깊이 숨을 들어 마신다. 한국의 산골, 5월과 캐냐의 1월 저녁 공기는 기온에서도, 습도에서도, 냄새에서도 너무 닮아 있다. 노을을 빗겨 받은 비석 위로 저녁 바람이 스치면서 평면의 흑백사진은 물기 머금은 입체감으로 부풀어 오르고, 거기 싱싱한 초록빛이 채워지기 시작한다........여자가 언제부터 노래하듯 중얼거리고 있었을까...그녀 중얼거리는 어휘들이, 그 낯말 하나 하나가 색깔이 되어 날아 오르다가 둥실거리며 구름으로 변하여 킬리만자로 산정을 향해 떠 올라 가고 있었다”

< 눈썹 한 개 뽑고 나서>에서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꿈과 절망, 그 허무를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구성과 스타일에 단편소설의 전범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동감에서 온다.  삶의 행 불행 과거와 현재의 불안과 평화는 화자와 독자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계약이다. 독자는 작품의 과거에서 온 사건과 현재 펼쳐지는 서사의 맥락을 따라가며 놀라움과 동의를 느끼면서 자신의 후일담처럼 여기는 마술에 걸리게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력적이다.

"용샘골(龍井里) 은 이제 아무 데도 없어. 그 공간 자체가 시간 속에서 소멸된 거지. 잡초더미에, 농약냄새에, 샘물도 이젠 썩어버렸고, 만약에 그 장소가 그대로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오염되어서 안돼.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지금 우리가 보리 낱가리 속에 굴 파고 들어가서 가슴이 콩콩 뛸 수 있어? 속눈썹 한 개 뽑고 그 뻘건 뱀딸기를 먹고, 능구렁이 한 마리 죽여 놓고 무서우니까 또 속눈썹 한 개 뽑고…… 결국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인물들이 투탄카멘의 묘앞에 있다는 사실은 바로 지금 여기의 현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세계, 그것이 바로 자유를 통해 치유받은 영혼의 세계이다. 과거의 속박의 끈에서 풀려나는 일 그것은 속눈썹을 뽑고 역경을 극복하든지, 시간을 초월하여 현실을 넘어서든지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연지가 카드 키를 손잡이 아래의 홈에 밀어 넣었을 때 나는 와락 그녀 어깨를 뒤에서 두 손으로 움켰다. 놀라 몸을 돌린 그녀. 검은 눈동자 위로 한 자락의 불길이 확 솟아 일렁이더니 급하게 사라졌다.

 "오늘, 우리 속눈썹 깡그리 다 뽑고 말까?"

 "속눈썹을?"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이 있고, 몇천 년 전과 현재가 같이 있고, 이곳에서는 시간이 정지할 수도 거꾸로 흐를 수도 있어. 그렇게 안 느껴?"

 그녀의 아직 모래 바람이 묻어있는 긴 머리칼 속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그래요. 오빠 말이 맞아요. 그녀가 그렇게 대답하듯 턱을 목 쪽으로 끌어내리더니 눈만은 그윽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 손끝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올려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연지는 눈을 감아버렸다.

  <시실리에서>는 사념이 시처럼 뒤섞이며 깨달음으로 귀일되는 소작이다. 삶과 죽음을 체험하며 허무를 극복하는 과정은 언어를 넘어서고 있다.  

"자랑스럽던 언어 구조물들이 서서히 금이 가고 와해되어 쏟아져 내렸다. 한 순간 접착력을 잃은 언어의 조각들은 몇 개의 단락으로 해체되면서, 문장들로 나뉘어져 질서를 잃고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단어의 조각들로, 끝내는 자음과 모음으로 부서져 그 구조물들은 끝내 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아득한 깊이의 동굴 속으로 내 육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가 일었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말이라는 것의 맹랑함. …… 한 개의 적절한 단어, 하나의 문장, 그것들의 조합을 위해 내가 기울여왔던 한 시절의 노고가 얼마나 도로와 낭비였는지. 더구나 언어가 소통을 정지했을 때 매미 허물 같은 흔적뿐인 무의미라니……."

이번 작품집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소재가 중첩되는 점이다. 그 연유는 작가가 스스로 밝힌바와 같이  누추한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는, 똑같은 상황을 맴돌고 있었다는 고백에서 밝힌바 있다.  그러한 한계는 상처입은 영혼들의 유사증세라 할 수 있다. 이땅에서 민주화투사로 이슬처럼 사라져갔든지, 혹은 월남이나 자바 등지의 동남아에서 원혼이 되었든지 젊은날 인연을 못 다한 관계 등에 처한 인물들은  누군가 보듬어 주어야할 역사의 상처이고 내 가족에 다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집이 보여주는 자아확장식 영혼치유의 새로운 소설시학의 패러다임을 시사한다.

작품집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세상살이에 밝지 못하고, 영악스럽지 않고 모질지 못하다. <하노이, 흐리고 가끔 비>에 나오는 아버지가 그렇고, 월남에 왼손과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온 형이 그랬다. <상사화 꽃 다지고>의 버버리 아내를 바다에 묻어 버린 주인공 ??나??가 그렇고, <암보셀리 그 사바나의 새벽>에서 밀림으로 사라진 수잔이나 K,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을 찾아 나선 신병두 그리고 <라마에 내린 비>의 나와 지수림도 역시 그렇다. 또 <겨울 동백 꽃 향기>의 소설가 민선생, 그들은 모두 인연의 끈에 연연하지만 선량하기 그지없다.  유금호 소설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결같이 투명한 영혼을 지닌 인물들이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과거 잘못된 시간에 대한 진실한 시각이 확보되는 것이리라.

유금호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 과거의 상처에 연연하고 그 아픔이 되풀이되어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감정을 정화시키거나. 억압된 감정을 회복시킨다. 수수께끼처럼 이해되지 않던 기억의 흔적과 인연의 엇갈림들이 오랜 방황과 떠돎 속에서 퍼즐을 맞추듯이 이해가 되어지고 영혼의 상처가 치유되는 상대의 배려와 이해로써 즉 공감을 통해서 복원되는 것이다. 분리된 기억을 통합해야하는 훼손된 인식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과 거기서 만나는 우연이지만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했던 인연의 엇갈림을 풀어주는 마술 같은 힘에 의해 치유된다.  그러한 치유능력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자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자아를 부정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영혼은 파편화되기 마련이다. 자아가 해체되어 분리되어 있을수록 자아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한을 남기고 떠돌게 된다. 그렇게 분리된 자아 조각들을 통합시키는 자아의 힘이 자의적으로 또 샤만처럼 타의적으로 형상화된 서사가 바로 유금호의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