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평>
   유금호의 '내 사랑, 풍장'과 허무의식
이 훈(문학평론가, 목포대 교수)
유금호 선생님이 2007년 2월로 정년을 맞이하여 흠뻑 정이 들었던 우리 목포대학교 국문학과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동안의 노고에 위로와 축하의 말씀을 올리면서 평소처럼 어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지속하시기를 빈다. 그의 장편소설 <<내 사랑 풍장>>(개미, 1999)에 대한 독후감을 얘기하는 자리지만 같은 학과에 근무했던 동료로서 소감을 조금 피력하고 싶다.
그가 유명한 소설가니까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이름을 알기는 했으나(지금도 나오는 문학 월간지 <<현대문학>>에서 다른 문인과 편지를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코너에서 한 쪽짜리 그의 편지와 사진을 처음으로 본 것 같다) 부끄럽게도 목포대학교로 오기 전까지는 그의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작품보다 사람을 먼저 알게 된 셈이다. 같이 근무한 기간을 세어 보니 어느덧 십 몇 년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서평을 쓰고자 이 작품을 정독하면서 객관적으로 그의 작품에 접근하려고 했지만 자꾸 그의 체취를 느끼는 쪽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 거듭하여 거론되는바, 김동리와 김동인에 대한 관심,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저 북극해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는 여행 경력, 술을 좋아하고 난초와 새를 키우는 것은 고스란히 그의 실제 체험이기도 해서 작가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로 다가오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이 그러한 것처럼 그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는 점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3층에 있는 교수들 연구실 가운데서 여학생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곳은 아마 그의 방이었을 것이다(참고로, 나는 그의 연구실 문손잡이에 어떤 학생―아마 여학생이었을 것이다―이 걸어놓고 간 홍시를 훔쳐 먹은 적도 있다.). 훤하게 잘 생긴 것도 그렇거니와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자유스러움과 소탈함이 그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의 방에 들르면 늘 웃음이 넘쳐났다. 그가 나이보다 몸과 마음이 유달리 젊은 것도 이렇게 젊은이들과 호흡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인기는 교실이나 연구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권유로 문인들의 모임에 그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연구실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여성 문인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드는 것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
이렇게 말하면 공평하지 못하다. 사실은 성의 구분 없이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목포에 있으면서 변함없이 이용하였던 목포식당은 그를 따르는 동료, 후배와 제자가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서 밥을 먹고 나서 다방과 술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차와 술 몇 잔씩 나누었던 즐거움도 이제는 옛날의 일로 남게 되고 말았다. 요즘에는 술을 좀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해서 따라다니는 것이 버거워 가는 곳마다 졸았던 기억이 새롭다. 방학 때마다 서울에 같이 사는 고광모 선생과 나를 불러서 사모님께 선물로 들어온 최고급 양주와 참치회 안주를 마시고 먹으면서 그의 여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곤 했던 아름다운 추억도 여기에 적어야 하리라. 이런 얘기를 하자니 양주에서 솔솔 풍겨 나오던 은은한 향기에 취하는 것 같다. 사람을 끄는 그의 향기까지 어우러졌으니 그럴밖에!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는 법이므로 그에 대한 험담도 해야 형평성을 제대로 갖추게 될 것이다. 그는 노래를 못한다. 술집 순례의 문화가 바뀌어서 최근에는 저녁 식사 모임이 끝나면 노래방에 가곤 했는데 거기서 노래를 하라고 하면 그는 '상중(喪中)'이라는 말로 넘어간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한 번도 듣지 못했을뿐더러 연구실에서 음악을 듣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사정이 이러니 사실은 그가 노래를 못한다는 것도 그냥 짐작일 뿐이다. 물론 빼어난 춤 솜씨가 있으니 노래 못하는 것을 얼마든지 벌충할 수 있다. 보아 하니 어디서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낙지처럼 온몸을 비비 꼬며―참고로, <<내 사랑 풍장>>에 “음악은 다시 흐느적거렸고, 부둥켜안은 사람들 모두가 척추를 잃어버린 낙지나, 지렁이 같은 형체를 하고 있었다”(157쪽)는 구절이 있다― 바닥을 휘젓는 모습이 내 눈에는 일품이다. 그 멋진 춤을 그려야 하는데 이런 때에는 소설가가 못 된 내 무능력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소설에 술과 춤이 나오고 음악이 들리기는 하는데 작가의 분신으로 나타나는 주인공의 노래가 빠진 이유가 설명되는 셈이다. 전기적 방법으로 그의 작품에 접근하려는 연구자에게는 꽤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다.
개인적인 소감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그의 여덟 번째 소설집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1998)의 서평을 <<대학신문>>에 쓴 적이 있는데 <<내 사랑 풍장>>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많으니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이 소설집의 세계를 몇 마디로 규정하면 ‘여행, 여자,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시공간을 통한 여행이고, 인류의 절반이 여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인간의 삶을 다루는 소설의 세계를 ‘여행, 여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얘기를 하는 셈인데,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여행과 여자를 다루는 소설가의 개성적인 방식을 살피는 데 있다. 이 개성적인 방식 가운데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허무주의적인 시각이라는 점을 미리 말하고 이 소설집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인간의 삶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겠지만 유금호에게 삶은 시간과 공간 속의 여행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관점은 유금호에게만 특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인간 삶의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인 성질을 강조하는 신화원형 비평에서 대표적인 원형의 하나로 통과의례를 드는 것만을 보아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통과의례는 자기의 세계를 떠나서 온갖 시련을 겪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자기 세계로 돌아오는 여행으로 구성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 소설사에서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염상섭의 <<만세전>>, 김승옥의 「무진 기행」,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청준의 「눈길」, 윤대녕의 「천지간」 등이 모두 여행을 통하여 인간 존재나 사회 현실의 심층을 해부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금호에게 여행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여행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뜻이 지시하는 대로 공간의 이동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새를 위하여>>(1996)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바 있는,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의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에 실린 많은 작품에서 작중화자나 주인공은 가까운 곳으로는 고향을 찾고, 멀리로는 저 남미의 페루 등지로 돌아다닌다. 이들이 여행에 나서는 이유는 한마디로 현재의 삶을 구속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밤이 긴 북구 쪽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전혀 모르는 낯선 인종들 사이에 철저히 혼자 서 있어 보자. 완전한 고독과 완전한 자유. 내 기준으로는 충동적이었던 그 여행이 그때로는 내 자존심의 전부일 수도 있었다.(「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
이렇게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금호는 낭만주의자이다.
여행의 또 다른 모습은 과거로의 여행이다. 낭만주의자들이 파편화되고 소외된 현실을 떠나기 위한 주요한 장치로서 좋았던 과거를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금호도 과거의 인연에 매달리고 행복했던 과거의 세계로 떠난다. 특히 「즐문마을 기행」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 속에서 노동과 유희가 일치되는 행복하고 순수한 삶을 영위했던 선사 시대로의 낭만적인 여행기이다. 서평자는 선사 시대가 이 작품에 그려진 것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가릴 만한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사실 리얼리스트의 창작 방법과는 완전히 무연한 이 소설가의 작품을 읽는 데 사실과의 일치성을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과거는, 사회,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따라서 구성원들에게는 삶의 피곤함으로 다가오는 현실과 대비하고자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이 소설집의 인물들에게도 과거가 언제나 행복한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과거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 지난 연대의 정치적 갈등을 반영하는 분신과 배신,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과 가난한 삶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과거는 하나의 질긴 인연의 끈이 된다. 이런 인식이 확장되면 숙명론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20대 후반. 인생을 감상으로 파악하던 내게 순구네가 처한 불행은 내게도 여러 날을 불면으로 몰아갔었다. 삶이란 건 처음부터 운명 같은 것이 주어져 있는 것일까. 먼 전생의 인연이라는 것이 현재의 삶 속에 투영되어 현재적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삶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인가.(「겨울, 동백 향기」)
상식적인 기준을 초월한 악마적인 인물을 다룬 「마루 위를 뛰어가다」―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행위가 위에서 말한 ‘여행’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를 제외하고서는, 소설집 제목에서도 얼른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소설들은 여자들을 주요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 여성들이 대체로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을 다루는 방식이 90년대의 주류적인 담론의 하나를 이루는 페미니즘의 관점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그 특이성으로 첨가할 수 있겠다. 이 소설집의 여성들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인간 삶의 우연성, 다른 말로 하면 운명론적 필연성을 확증하는 존재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소설에서 남녀의 만남 특히 성적인 관계는 우연히 이루어지며, 만남 속에 이미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수림과 나는 그날 밤 예기치 않았던 첫 정사를 가졌다. (중략)“신기루가 아니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지난 일이지만 그 후 수림은 우리의 정사를 그렇게 회상했고,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했었다. 그녀와의 결혼, 그리고 일년 후의 이혼까지도 우리가 사막에서 보았던 그 신기루의 환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그 후에도 가끔 했다.(「신기루를 찾아서」)
이처럼 남녀 사이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듯이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 가는 과정이나 아니면 성적인 불평등의 관점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주체로서는 어떤 능동적인 힘을 작용시킬 수 없는 운명론적인 궤도의 일환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얘기할 허무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현실적으로 80년대의 험난한 역사가 보여주는바 “역사의 흐름이란 그 개인들의 희생 위로 멋대로 흘러가는”(「그 꽃상여 그림자」) 우연성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삶 자체를 환상으로 인식하는 삶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이다.
정확하게 11개월의 결혼 생활. 우리는 심한 의견 차이로 다투거나 부부싸움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반년쯤 지났을 때 우리는 거의 비슷하게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관계에 얽매여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왔고,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 둘 다 잠시 신기루를 보고 있었던 그런 느낌 안 들어? 맞아요. 가끔 나도 그 생각을 했어요. 그럼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요. 그게 낫겠어요.(「신기루를 찾아서」)
그래서 이 소설집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어떤 문제를 개선하거나 올바르게 돌려놓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저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거나 훌쩍 여행길에 오른다. 그래서 유금호의 소설은, 주어진 운명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운명을 초월한다고 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운명론을 감동적으로 묘파한 김동리의 「역마」의 세계를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각자의 관점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이 소설들이 얼마나 깊이 운명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느냐 하는 점을 꼼꼼하게 따지는 일이다. 이것은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 사랑 풍장>>을 논의할 차례다. 이 글의 제목을 <원향에 대한 향수>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의 소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국문학과 박사 과정에 적을 두고 있는 일인칭 화자 주인공 강영규가 작성하고 있는 김동리 소설에 대한 보고서의 제목이다.
김동리에게서 보이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무당들의 저 카오스적 세계에 대한 근원적 향수 같은 것은 개개의 작품에 관계없이 그들 소설의 깊은 곳을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김동리 소설의 그런 특색에 <원향(原鄕)에 대한 향수>이라는 제목을 붙여 지금 리포트로 준비하고 있다.(146쪽)
여기서 원향은 시대와 현실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뜻한다. <<내 사랑 풍장>>에서 원향은 죽음과 사랑이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현실에서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인 공간에서의 영원한 삶으로서의 죽음이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한 삶으로서의 죽음을 완성하는 매개체다. 그래서 죽음과 사랑은 동일시된다.
그런데 <<내 사랑 풍장>>은 김동리 소설론의 소설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여러 곳에서 김동리 소설의 성격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도를 따라가고 있기도 하다. 강영규는 박사 과정 면접시험에서 김동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키겠다는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동리 소설은 외부적인 문제나 현실 상황에서 단절된 인간 내면의 본질 추구, 인간의 원형적 사고와 숙명 등에 관심을 보여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그가 사는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가정 하에서 동리 소설을 상황과의 관계 위에서 재조명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48쪽)
박사 과정에 입학해서는 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서 소개한 <원향에 대한 향수>라는 제목으로 김동리 소설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발표하기도 한다. 강영규가 보기에 김동리 소설의 핵심은 “표층적인 생사를 넘어서 원형의 낙원으로 복귀하고 있”다(148쪽)는 데 있다. 그래서 “「당고개 무당」이나 「만자동경」에서의 무당은 그 왕래(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왕래―인용자)가 차단되자 현실적인 생명을 버리고 본질적인 낙원으로 회귀해버린”다.(149쪽)
김동리 소설의 중요 작품들은 낭이가 그린 그 본질적 낙원으로의 회귀 과정을 반복해서 추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예 김동리는 그의 소설 출발점에서 소설 <무녀도>의 서두에 그림으로 낙원을 미리 설정해 놓고 그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는 길 찾기의 작업을 일생 동안 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149쪽)
이런 발언은 유금호 소설에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앞에서 <<내 사랑 풍장>>의 원향을 죽음과 사랑으로 규정하고 죽음을 두 유형으로 나눴는데 둘 사이의 관계는 현실의 죽음에서 사랑을 거쳐 신화적인 공간의 상징적인 죽음―이 죽음은 ‘풍장’의 이미지로 표상된다―에 회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말’에서 “살아왔던 날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짧다는 인식 앞에 드디어 나는 육신과 영혼의 흔적, 사랑과 고뇌, 청춘의 자화상까지도 비바람 속에 흩날려 버리는, 그 무화, 그 풍장을 생각했을 것입니다”(6쪽)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지나간 젊은 연대의 고뇌의 기록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꿈꾸는 낭만적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상징적인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통과의례의 원형적인 모티프를 근간으로 하는 작품인 셈이다. 그러므로 풍장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야 이 작품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도처에 널려 있다. 주인공이 열 살 때 죽은 그의 어머니에서부터 정치적 저항으로 분신자살한 한현상, 자살한 그의 누이 한채희, 병으로 돌아간 그의 아버지, 그의 친구 시인 윤진우의 어린 딸 진주, 광주 항쟁에서 부상당하여 10여 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웠다가 죽임을 당한 김현식과 그를 죽이고 자살한 그의 형 김현구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시작 부분에 소개된 시베리아 북단 툰트라 지역의 축치족의 장례식이라든가 티베트의 조장(鳥葬) 풍습, 남미의 아즈텍족의 축제에서 인간이 최고 신의 자격으로 죽임을 당하는 의식 등이 죽음의 긴 목록인데 죽음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전체 4부 가운데서 3부까지가 특히 그렇다. 2부에서는 그 제목이 ‘겨울바람 그림자’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이 등장하고 있는데 주인공에게 가까운 이―한채희, 아버지, 진주―들이 이 계절에 죽는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현실에서의 죽음은 작가의 허무주의와 연결되고 있다. 한현상의 자살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듯이 현실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지하거나 방해할뿐더러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둘 만한 세상이 되지 못한다. 강영규가 김동인의 「광화사」에 대해서, 그 주인공 솔거에게 죽은 어머니가 절대미로 고착되어 버려서 “현실에서 그 절대미의 대상을 찾을 수 없”다(200쪽)고 한 것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황순원의 「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도 인용해 둘 필요가 있겠다.
거기에 황순원(黃順元)의 <별> 역시 같은 차원의 원초적인 비극이었다. 소년에게 있어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는 그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는 데서 절대화되고, 그 추상화의 기준이 변하지 않는 한 주인공은 현실 속에서 비슷한 여자를 만날 수 없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LINEBREAK/>나는 결국 허무와 절망으로 결말지어질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이 미를 찾는 안타까운 탐색과정의 무모성 속에서 문득 인간의 한 조건을 확인해 보는 느낌이었다. 결국 소설 자체가 그 허무를 확인해 가는 하나의 여정, 그 절망의 결말을 확인하는 탐색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논리를 전개해 나갈 작정이었다.(201쪽)
이 허무주의에 주목한다면 한현상의 죽음이 정치적인 관점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겠다. 부당한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이나 그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지 않고 현실에서의 삶이 허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희생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이용되어 버릴 뿐이라는 인식이 이런 태도를 지니도록 만든다.
“개인의 희생을 역사가 보상한다고 누가 그랬지?...... 앞으로 봐...... 이제 제 자신, 제 가족, 제 친구 일 아니면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는 세상이 되는 거다...... 개인의 희생으로 생긴 과일은 현장에서 비껴서 있던 기회주의자들만 챙기고.....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이 자기들 중심으로만 기록하고...... 그걸 사람들이 이제 알아 버렸거든.”(191쪽)
따라서 현실에서의 허무한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존재 조건이 된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죽은 것이라든가 20대의 좌절 같은 것은 이 허무감을 구체화하는 예이다. 요약하여 말하면 “신산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20대와 서른을 넘기면서 겪은 자기 연민, 그 쓸쓸한 정신적 방황과 회의, 대상이 불확실한 끝도 없던 여러 색깔의 분노”(224쪽)가 될 것이다. “이승은 또 하나의 환각이고.... 아니면 외출이고.... 신기루”(152쪽)이며, 역사는 “허깨비”(210쪽)이다. 도저한 허무주의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현실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는 이제 어느 정도 밝혀진 셈이다. 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든지 현실을 벗어나는 여행―따라서 이 소설에서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면서 아울러 아주 먼 과거로의 여행인데 후자의 측면이 훨씬 더 중요하다―이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랑도 현실에서 이뤄지는 것인 한 허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신화적인 양상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랑의 완성은 신화적인 죽음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 윤진우 부부가 헤어진다든지 최선희가 파혼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현실은 사랑하기에는 불모의 땅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행은 현실에서 벗어나 낙원으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신산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20대와 서른을 넘기면서 겪은 자기 연민, 그 쓸쓸한 정신적 방황과 회의, 대상이 불확실한 끝도 없던 여러 색깔의 분노, 그것들을 이제 한 묶음으로 괄호 처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신학기 대학 강단에의 꿈은 얼마간 다시 유보해야 할 현실적인 자기 확인,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제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확실한 인식, 그래서 살아왔던 모든 기억의 앙금을 일단 정지시키고, 원점에서 계획하는 삶의 도약으로의 계기, 채희의 그림을 포장하면서 흘렸던 눈물로 나는 내 청춘의 한 시기를 끝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때까지 한 시기의 내 삶이 내 눈물 속에 정화되고 내가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계획을 하면서 나는 곤충의 변태(變態)를 떠올렸을 것이다. 번데기로의 변태, 혹은 우화(羽化)로의 환영, 막연하지만 전환점으로의 기대는 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주를 잃은 공간 때문에 그가 헤매고 다녔던 한 계절에서 그 역시 이제 전환이 필요했다.(224쪽)
강영규와 윤진우의 여행지인 페루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한국과 위치와 계절이 정반대로 바뀌는 공간의 의미도 의미지만 시간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먼 옛날의 유적이나 신화를 찾아가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속에 작가와 주인공이 추구하는 원향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정화의 의식을 치르는 물도 “수십만 년 쌓이고 굳어진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247쪽) 영원에 가까운 물이어야 한다. 물론 이 물은, 그 부재로 말미암아 주인공에게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으로서 외로움을 자각하게 했던 어머니와 화해하게 한 고향의 바닷물과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물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자궁이고 현실의 때를 씻겨 주는 정화제의 원형인 것이다.
안데스 산정, 수 십 만년 쌓이고 굳어진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 우르밤바 계곡, 신성한 물 속에 나는 온 몸을 담근다. 불과 얼음, 나는 순간 생각한다. 물의 시작, 그리고 그 끝. 피부를 저미어 대는 몇 만 년의 냉기를 이를 악물고 잠시 참아내자 그 신성한 물의 체온, 얼음 같은 냉기 속에 용해되어 가던 육신과 영혼 속에서 천천히 내 삶의 흔적들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뒤엉킨 인연과 삶의 더께들이 불순물로 해체되어 안개처럼 부우옇게 떠올랐다가, 한 가닥씩 연기가 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은 드디어 서서히 새하얀 얼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멀리서 멈칫거리던 별빛들이 작은 조각으로 변해서 내 얼음으로 변해 가는 육신의 곳곳으로 달려 들어와 박히는 모습을 내가 어느 위치에서인가 바라본다. 그때 불어오던 한 가닥 바람 속에 실린 키니네 꽃향기...... 드디어 완전히 얼음으로 변한 내 영혼과 육신이 노란 키니네 꽃잎만큼씩 한 크기의 균열을 이루어 거대한 안데스의 대지와 공기 속으로 자유로운 비상을 시작한다. 내 젊음의 오래된 불면과 욕망과 분노와 좌절이 빠져나간 내 순결한 육신과 영혼이 만년설 쌓인 순백의 공간 속에 조각조각 흩어져 새로운 생명의 원소로 환원하여 자유롭게 흩날려 가는 모습.(247-8쪽)
이제 풍장, 다른 말로 하면 신화적인 공간에서 치러지는 상징적인 죽음에 이르렀다. 현실의 육신을 버리고 새롭게 우주 만물과 결합하여 자유로워진 모습이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풍장은 단지 삶의 무화 또는 끝이 아니라 널리 흩뿌려지고 원향과 만남으로써 세상과 하나로 용해되는 대자연의 더 깊고 넓은 차원의 활동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풍성한 삶, 낙원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므로 어린 딸을 잃고 그 아픔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진 윤진우가 “서울에서하고는 전혀 다른 분같이 밝아지”고(250쪽)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사랑이 강영규와 박민주에게 깃들어서 원주민에게 신혼부부냐는 질문을 받을 뿐만 아니라 둘이 사랑을 고백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해 신화적인 분위기가 낯설고 비현실적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측면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을 구속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은 것이 인간의 또 하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유금호의 <<내 사랑 풍장>>은 인간은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초월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아름답게 그려 보이고 있다. 물론 그 꿈이 구체화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 사랑 풍장>>의 결말이 시적인 상징으로 모호하게 맺어지는 것은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대로 하면 인간에게는 꿈꾸는 자유만이 허락되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