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해설>
요설(饒舌) 속의 아웃사이더
                                      (계몽사, 우리시대의 한국문학 권13. 1991. pp182-184)
 
                                                                                     문학평론가 윤강원

유금호(兪金浩)는 전라남도 고흥군의 맨 남쪽 끝머리, 바다 건너로 소록도를 마주 보고 있는 녹동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하늘을 색칠하라>가 당선되어 문단에 들어섰다. 그 동안 다양하고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벌여 왔으며 작품 세계의 점진적인 변모와 발전을 이룩해 오고 있다. 창작집으로 <하늘을 색칠하라>(69),<깃발>(77), <한 마리 작은 나의 꿩>(79) 등을 묶어냈고, <폭설>(74),<아아, 바람이 분다><겨울에 내리는 비>(80) 등의 장편을 출간했으며, 최근에는 80년대 초 서울의 S신문에 연재하던 역사소설<고려무>가 5공 정권의 출범 초기 중단되었던 것을 드디어 탈고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죽음 의식>을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국립 목포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60년대 후반, 등단 초기 가장 정력적인 창작 의욕을 과시한 작가의 작품들은 첫 창작집<하늘을 색칠하라>에 집약되어 있다. 이 무렵의 특징은 문체의 간결성과 묘사의 감각성으로 지적된다.

거창한 주제나 심미 의식을 피해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국소적인 '실존과 상황'의 긴장과 허무를 분위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과수원에서 소년기까지 보낸 작가의 생래적 기질과 60년대 특히 많이 읽히던 훼미웨이, 카뮈, 혹은 T.S 엘리엇 등의 영향도 배제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70년대에 들어 작품 세계의 변모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치 사회의 현실적 상황이 급격히 경직되고 획일화되어 가던 무렵이었다. 모든 지식인 작가들이 현상에 대한 응전 태도를 취하고, 소위 참여 논쟁의 와중에서 고뇌하고 있었고, 증폭된 역사 의식의 미로에서 저마다의 방식대로 방황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유금호는 직설과 대결보다는 자신의 예술가로의 신념이 수용할 수 있는 알레고리와 풍자의 길로 보다 더 깊이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단편 <패배의 겨울>은 원죄의 수준에까지 다다라있는 본능적 본질적인 인간의 권력(정복) 의지가 종국에 맞게되는 참담한 허무를 낭만적 비극성의차원에까지 형상화하고 있다. 단편 <파란 빛 파리 떼>에서도 작위적 관념이나 유형화된 역사 의식 등과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한 인간 자체의 원초적 한계와 숙명의 허무를 제시하여 희랍 비극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70년대 후반에 이 작가는 부지런히 천착한 역사물의 세계에서는 그가 현실을 통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이 드러나 있다. 물론 바람직한 역사소설이란 그것이 현실 속에서 이룩하고자하는 의미망의 적절성과 형상화에 의해서 평가되기 마련이다. 70년대 후반 우리 사회에서 경험한 바,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경제 구조의 개편 과정,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진 권위주의적 정치 사회 상황을 두고, 작가의 응전은 역사물을 통한 알레고리와 풍자의 수법이었음에 틀림없다.

가령 <만적(萬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류사의 영원한 주제인 자유와 인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습 권위와 천민들의 본능적 몸부림 사이의 갈등이라는 이원적이고 평면적인 구도를 거부하고 있는 점에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대에 걸친 난세의 어려움을 제거하고 국가와 백성들에게 치세의 질서를 부여하고자 고뇌하는 혁명가 최충헌의 높은 경륜과 비인간적인 신분의 속박을 쳐부수고 사람다움을 쟁취하려는 노비들의 봉기, 그 사이의 대립 갈등 외에, 변란을 빌미로 대권을 탈취하고자 원하는 맹목적이며 부도덕한 권력 의지의 사악한 갈등(장군 최정)을 병치시켜 더 입체적 구조의 알레고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중편 <홍다구(洪茶丘)>에서 보여주는 인물의 전형성은 하나의 상징이다. 고려라는 조국에 등을 돌리고 아예 원에 귀화해버린 가문의 후예, 홍다구, 그는 대원(大元)이라는 엄청난 실세를 등에 업고 다시 고려에 나타나서 철저하고 비정하게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역할은 원을 핑계대고 있으나 원을 위함도 고려를 위함도 아니다. 거대한 권력 구조의 사슬에 끼어 경륜도 의식도 없이 기계적 능률성을 발휘하며 인간성을 파괴하는 권력 테크노크래트의 전형이라 하겠다.

장편 <고려무<高麗舞)>는 특히 고려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선호하고 있는 작가의 야심작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과 살육과 분탕질, 강화 천도와 무단 장권의 부침과 작폐, 특히 최씨 정권의 말기적 징후들이 도정되면서 그야말로 외환 위에 엎치고 덮치는 내우, 그 도탄과 질곡 속에서 보통의 고려인들이 지켜내려는 자존과 긍지, 신불에 대한 원력과 자기 극복의 과정 속에서 형상화되는 '고려 춤의 춤사위'는 그대로 당대 문화의 특별한 기미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 빈번히 거론되는 군사 문화의 부정적 폐단, 즉 저급성과 무사려한 편의주의가 결과하는 황폐성을 날카롭게 꿰뚫어버리는 알레고리이며 풍자성이다.

80년대에 작가는 비교적 외곬으로 학문적 성취에 집착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최근의 작품은 아마도 <숨어있는 혀>(89)가 될 것 같다. 어디에선가 작가가 <- 혀>연작물을 구성하고 있다는 식의 말을 직접 하고 이야기 한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사실 <숨어 있는 혀>와 그 보다 무려 십 년 전에 집필된 <혀>(79) 두 작품은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분명히 한 개의 축에 나란히 꿰어져도 좋을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두 작품 사이의 분명한 차이와 거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스타일이 시종 요설(饒舌)형 독백체로 일관되어 있는 점은 작가의 의식의 의지적 발로인 셈이다.

단순한 독백보다 요설은 메시지의 운반과 설득을 더 강하게 환기하기 마련이다. 말로써 말의 부실성과 허구성을 극복하려하듯이 줄기차게 쏟아붓는 요설은 문어체의 통제된 기만이나 허위의식이 끼워 들 틈을 주지 않는 순수한 입담, 그대로이다. <혀>의 주인공 화자의 입장은 처음부터 일종의 국외자임을 자인하고 있다.

애초에 좌절의 주인들은 일단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현실은 어떻고.....'등으로 거론 중이며 그 내용은 '비판과 울분의 토로'에 머물러 있다. 화자는 한 편으로는 부러워하며 다른 편으로는 고까워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합석이 된' 상태이다. 물론 대화의 상대는 젊은이들이 아니라 같은 연배, 같은 세대 감각을 전제로 하는 또 하나의 국외자가 된다. 6.25 참전 경험과 그 보다 먼저 있었던 '남의 전쟁', 태평양전쟁에 끌려나갔던 경험이 둘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화자는 남태평양의 정글 속 전장에서 겪은 특별한 체험을 털어놓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것은 극한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 생존 투쟁과 공존 그리고 기이한 경악의 추억담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들씌워져 있는 본질적인 무의미, 그 허탈감, 허무감이 요설 충동의 진원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요설적 독백 속에서만은 화자는 지금 눈앞에서 '번민 중인 젊은이들'류의 비판 의식이나 이념, 관념적 여사 의식의 죽어버린 형해같은 무의미로부터 진정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비정한 역사를 일관해서 떠받치는 관념적 지주의 부재를 통찰하면서 하나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해 버린다. 10년 뒤에 쓰여진 <숨어 있는 혀>는 똑같이 요설의 형식을 빌려 있으면서도 그 구성과 밀도는 더 조밀하고 복합적이다. 요설의 인지망이 포괄하는 범위가 당대적 현실이기 때문에 그 포착 흡인력이 예리하고 끈끈하다. 늘 소설을 쓰겠다고 입버릇처럼 다짐하면서도 한 번도 주체적으로 살아 보지 못하고 '선거 유세장'이나 '데모 대열 근처를' 얼쩡거리는 주변인, 국외자로 떠돌다가 현실의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곤 하면서 어느 날 불쑥 찾아와 "나 뚜부 좀 멕여줘야 쓰겄네. 서너 모 한꺼번에 묵어 볼까 어짤가" 그러다훌쩍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던 친구. 종당에는 흔들리는 시내 버스 속에 앉은 채로 갑자기 '제멋대로' 사망해 버린 한 친구. 화자의 요설은 그 돈키호테적 인물을 중심으로 서넛의 에피소드를 오버랩 시키면서 맴돈다.

비오는 날의 호숫가, 포장 집, 그리고 술기운과 물안개, 빈번한 배설 충동등은 그것대로 하나의 분위기를 짙게 이끌며 시대적 상황의 막막함을 암유하기에 충분하다. 광주사태, 죽은 자들, 그 속에 끼여있는 동생의 죽음, 그 동생을 떠돌게 한 한(恨)이 되었을 출생의 비밀과 어머니의 사연, 또 그녀의 한....., 화자는 그런 것들 위에 역사의식이라는 연대 감정의 틀을 부여하기를 유보한다. 썩을 놈들. 죽어 뿐 놈들은 말도 못하는 디, 지들이 뭐라고, 더러워 죽겠다. 자네, 죽은 사람이 말하능 거, 봤능가? 죽은 사람이 입을 딱 벌리고, 시방 내 기분이 이렇다. 그렇게 말하능 거, 못 봤제? 에라, 썩을 놈들.... 일반화된 고정 관념이나, 상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실존적 상황, 혹은 운명에 집착하는 그 돈키호테 친구의 독백 속에는 아웃사이더적 자각이 들어 있다.

그것은 정직하고 예리한 본질적 통찰이외에는 그 어는 것에도 의미나 가치를 거부한 절대 자유의 정신이 시퍼렇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독자들은 저 숨어 있는 혀, 또 다른 아웃 사이더가 '대바람 소리'나 '역마살의 혼'을 통해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수한 청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계몽사, 우리시대의 한국문학 13 pp181- 184)